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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가 무대다] <14>전진중공업…뚝심의 CEO 안의환 회장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07-04-02 18:38     조회 : 4652    
"콘크리트 펌프카 우리 손으로"… 16년새 세계 '빅3'
[세계가 무대다] <14>전진중공업…뚝심의 CEO 안의환 회장
건설 붐으로 없어 못파는데 수입만 보자니…"30년 앞선 외국기업 잡겠느냐" 무모한 도전
98년 100% 국산화 성공 쾌거 이후 탄탄대로


중장비업계 세계 1위를 꿈꾸는 안의환 전진중공업㈜ 회장은 “장비가 장비를 더 많이 판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화려한 말보단 완벽한 품질이 해외시장에서 경쟁력을 갖는다는 설명이다. 원유헌기자 youhoney@hk.co.kr

알만한 사람들은 다 비웃었다. “돈 좀 벌더니 미쳤다.”“무모한 짓이다…” 솔직히 계산기를 아무리 두드려봐도 답이 안 나왔다. ‘30년이나 앞서간 외국 기술을 무슨 수로 따라잡을 수 있을까.’‘설사 비슷하게 만든들 누가 사주기는 하겠나.’ 십중팔구 지는 싸움이었다.
#1991년 어느날. 안의환(52) 전진중공업㈜ 회장은 다들 말리는 길을 홀로 나섰다. 전진산업㈜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콘크리트 펌프카(CPC) 제조의 꿈을 담았다. 당시 CPC 제조는 독일 등 손꼽히는 기계 선진국만 가능했다. 우리는 CPC 기술의 핵심인 상부장치를 트럭에 얹혀 파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굳이 공들여 만들 필요도 없었다. 판매차익과 얼추 흉내낸 부품 제조만 해도 남는 장사였다.
#현재. 세계 80개국의 건설현장에는 어김없이 50m가 넘는 기다란 붉은 색 파이프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콘크리트를 촘촘한 벽 사이에 집어넣고 있다. 허리에 ‘JUNJIN(전진)’ 로고를 단 CPC다. 안 회장은 수입에만 의존했던 CPC를 국산화하고 세계시장으로 역수출하며 세계 3위 업체로 우뚝 섰다. 그는 ‘상식을 벗었더니 (기술개발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기름밥 먹던 농군의 아들이 세계를 누비다
안 회장은 뚝심이 넘친다. 한 달에 절반 이상은 업무 때문에 해외에 나가있지만 지친 기색은 찾아볼 수 없다. 출국 시간을 3시간 앞둔 인터뷰 내내 여유로웠다. 조급하지 않은 넉넉함과 타고난 건강이 사업성공의 원천인 듯 했다.
그는 전남 보성의 녹차 밭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손바닥만한 땅을 짓던 집안의 5남 2녀의 둘째로 태어났다. 공부는 곧잘 했지만 시골에서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중학교 때 무작정 상경해 주경야독을 했다. 그는 “판검사가 돼야 성공하는 줄 알았다”고 했다.
시골 촌놈에게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입에 풀칠하느라 공부는 늘 뒷전이었다. 성년이 되자 중고 중장비를 정비하고 부품을 만드는 아르바이트가 그대로 직업이 됐다. 그는 “고시공부를 하다가 유압의 원리 등 기계의 무한한 힘에 끌렸다”고 말했다.
“남들보다 부지런하고 열심히 일한 것 밖엔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가 어느날 고개를 갸우뚱했다. 80년대 말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 ‘주택 200만호 건설’ 정책에 따라 CPC는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는데 값비싼 수입 완제품만 고집할 뿐 누구 하나 국산화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CPC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 였는데도 한국에선 생산을 못 하는 게 이해가 안 갔다”고 말했다. 사실 CPC는 엄청난 길이(30~63m)의 콘크리트 수송관을 흔들림 없이 지탱해주는 기술이 관건이라 제작이 쉽지는 않았다.
당시 기계에 빠져있던 그는 일찌감치 CPC 부품을 자체 제작하는 일에 몰두했다. CPC의 수입가격이 너무 높아서 부품만 만들어 팔아도 먹고 살만 했다. 새벽 5시면 출근해 CPC를 뜯어보고 만져보고 자로 재보면서 수송관, 개폐기 등 몇몇 부품의 국산화에 성공했다. 20만원짜리 부품을 자체 개발해 5만원에 팔았다. 그는 “수입업자의 횡포가 심했던 탓에 품질은 조금 떨어지지만 우리가 만든 부품 가격이 워낙 싸서 잘 팔렸다”고 말했다.
부품개발에 대한 흥미는 차츰 CPC 완제품 제작이라는 원대한 꿈으로 바뀌었다. 관련업계 사람들은 코방귀를 뀌었지만 그는 괘념치 않고 91년 CPC 제조회사를 차렸다. 하루도 한가하게 지낸 적이 없었다. 기계더미에 묻혀 분해하고 조립하기를 거듭했다. 생각은 넘쳤지만 기술은 쉽게 따라잡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벤치마킹이 필요했다. 93년 CPC 1위 업체인 독일 푸츠마이스타사의 제품을 수입하면서 기술협약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평생 기름밥을 먹었던 그가 품질과 기술력으로 세계를 누빌 날개를 달게 된 셈이다.
▲‘제발 한대만 사주세요’
94년 3월10일 드디어 자체 기술로 CPC 장비 1호(43m)를 만들었다. 기쁨이 오죽했으면 이날을 전진중공업 창립일(원래는 2월5일)로 다시 선언했을 정도다. 안 회장은 회사경영 기술개발 공장관리 1인3역을 감당했다. 그는 “국내엔 아는 사람도 없고 장비에 대한 인식도 없어서 고생을 많이 했는데 당시 연구소장을 맡았던 조재규 전무이사의 공이 컸다”고 했다.
수입품보다 30% 쌌지만 사는 사람이 없었다. 다행히 부품 공급으로 신뢰를 쌓았던 김영중 전 현대건설 상무가 선뜻 장비 1호(4억8,000만원)를 사줬다. 안 회장은 “김 전 상무가 없었다면 아마 포기했을지도 모를 사업”이라면서 “꼭 한번 만나 뵙고 싶다”고 전했다.
이후 한 달에 한 대꼴로 팔려나가던 전진의 CPC는 96년 해외시장에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외환위기 한파로 온 나라가 휘청거렸지만 전진중공업은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기술연구소를 설립해 연구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결국 98년 CPC의 100% 국산화에 성공했다. 2002년부터 지금까지 국내 1위, 세계 3위의 점유율을 놓치지 않고 있다.
“한 달에 CPC 10대만 팔아도 죽어 여한이 없겠다”던 안 회장은 이제 매달 50대 이상을 팔고 있다. 2001년부터 최근까지 판매한 CPC는 1,343대다. 미국 캐나다 남미 유럽 중국을 넘어 중동과 독립국가연합(CIS)으로 시장을 확대하고 있다. 그의 꿈은 매달 100대를 팔아 전세계가 12시간 안에 ‘전진’이라는 이름으로 네트워크가 이뤄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해외로 나간다. 나이가 들수록 꿈이 커진다. “세계 1위를 못하면 발 뻗고 잠을 못 잘 것 같아요.” 지금도 그의 수첩에는 해외출장 일정이 빼곡히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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