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커밍아웃한 트랜스젠더 변호사. 박한희 변호사에게 자주 따라붙는 설명이다. ‘최초’, ‘커밍아웃’, ‘트랜스젠더’라는 단어 모두 무게감 있는 단어일 수 밖에 없는데, 박 변호사는 그걸 늘 짊어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그는 ‘특별한’ 사람이지만, 빡센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일하는 사람’ 중 하나라는 점에서는 그리 특별하지 않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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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만남은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에 소속된 변호사이자 ‘무지개행동’ 활동가를 겸하고 있는 그의 일에 주목하고자 했다. 박한희
야마토게임방법 변호사는 왜 이 일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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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익인권변호사모임
릴짱릴게임 희망을만드는법 사무실에서 박한희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눴다. ⓒ일다
영하의 추위가 이어지는 어느 날,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이하 ‘희망법’) 사무실에서 박한희 변호사를 만났다. 요즘은 무지개행동 사무실에서 더 시간을 보낸다며, 연초라 이런 저런 활동 계획 세우
신천지릴게임 기에 시달리고 있다는 박 변호사와 ‘이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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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꿈은 뭐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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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과학자였어요. 어릴 때부터 과학, 수학을 좋아했거든요. 선생님이 자연부장을 하게 해줘서 친구들이랑 과학실 가서 실험하고 그랬죠. 학창 시절 내내 그 꿈밖에 없
골드몽릴게임릴게임 었어요. 과학자/로봇공학자가 되겠다는 거요. 대학 전공을 정할 때도 선생님은 의대 갈 생각 없냐고 그랬는데, 로봇공학하려면 기계공학이나 전자공학해야 한다 그래서 기계공학을 선택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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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꿈은 왜 이뤄지지 않았을까요? 방해 요소가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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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다닐 때까지만 해도
야마토게임하기 로봇 연구소에서 인턴도 하고 그랬어요. 근데 대학 때부터 성정체성 관련된 고민이 깊어지면서 혼란이 시작되었어요. 중·고등학교 땐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면 대학을 다니면서 시야도 넓어지고, 여러 정보를 찾아볼 수 있게 됐거든요. 트랜스젠더가 있다는 건 알게 됐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는 것 같았어요. 우울이 시작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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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상태로 로봇공학자가 되더라도, 내가 ‘나로서’ 이루는 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계속 가면을 쓰고 숨어든 상태에서 그 꿈을 이루더라도 즐겁지 않을 것 같았어요. 정말 내가 이루는 게 아니니까. 그때부터 자포자기가 됐어요. 미래에 대한 생각도 접었죠. 그냥 되는대로 살자, 꿈이 무슨 소용이냐고요.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했어요. 어쨌든 밥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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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기숙사와 고향을 벗어나고 싶었어요. 4년 내내 기숙사에 있었는데 당연히 남자 기숙사였고, 공용 샤워실을 써야만 했어요. 이런 생활은 더이상 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서울로 가자. 혼자 살자’고 생각했죠. 회사를 선택할 때 기준은 그것 뿐이었어요. 사실 기계공학 전공하고 서울에서 근무하기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엔지니어링 회사에 들어갔고, ‘기계 구매’ 파트에서 일했어요. 사실 이 일은 영업, 마케팅 쪽에 가까워서 주로 돈 협상하는 일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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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회사에서 2년 2개월 일했는데, 1년차 때는 그냥 돈 벌자는 생각으로 있었는데 2년차부터 ‘이걸 내가 언제까지 해야 하지?’ 싶더라고요. 전공으로 배운 걸 써먹는 것도 아니었고요. 그리고 ‘언제까지 내가 정체성을 숨기고 살 수 있을까?’ 싶기도 했어요. 언젠가 남에게 아웃팅을 당하든 내가 참다가 폭발해서 말해버리든 무슨 일이 생길 것 같고, 그 때 회사가 날 지켜주지도 않을 것 같더라고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시간이 너무 아깝더라고요. 다른 일을 해야겠다 결정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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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쿨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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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트랜스젠더 임이 밝혀졌을 때도 짤리지 않는 일이어야 했어요. 그럼 내가 사장이 되어 어떤 가게를 운영하던가, 전문적인 자격증이 있어야겠더라고요. 변리사, 변호사, 의사를 생각했는데 마침 대학 동기 중 하나가 로스쿨 나와서 변호사를 하는데,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로스쿨을 준비하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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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지션’은 로스쿨 들어간 이후에 하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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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쿨에 ‘남학생’으로 입학했고 1학년을 보냈어요. 그리고 나니 30살이더라고요. 추운 겨울에 침대에 누워있는데 ‘20대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지 못하고 가 버렸네...’ 싶은 거죠. 그 시간이 너무 아깝더라고요.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 휴학을 했어요. 그 때 부모님한테 커밍아웃하고 트랜지션을 시작했죠. 학교에선 뭐 어차피 졸업하면 끝이니까 괜찮을 거라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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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한국의 법조계에서 트랜스젠더를 변호사로 고용해 줄 것인가 걱정이 되긴 했죠. 기껏 자격증도 땄는데 일을 못하면 소용 없잖아요. 그래서 이리 저리 찾아보다 희망법에 연락을 했어요. 희망법이 성소수자 관련 사건을 맡아서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혹시 진로 상담도 해줄 수 있냐고 문의한 거죠. 한가람 변호사를 만나 얘기를 하게 됐어요. 사실 그 때까지 공익변호사라는 게 뭔지도 몰랐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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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들어보니 지금의 공익변호사가 되기까지, 어떤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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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계획이 없었어요. 대학 때 정체성 고민을 시작하면서 자포자기 상태였기 때문에 ‘10년 뒤에 무엇을 한다’ 이런 생각은 전혀 하질 않았죠. 다만, 돈을 벌지 않으면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돈을 벌어야 한다고만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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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으로부터 ‘로스쿨에 가면 성소수자 비율이 꽤 된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어요. 미국에서는 최근 로스쿨 졸업한 신입 중 LGBTQ+ 비율이 13%나 된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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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있긴 한 것 같아요. 여성 퀴어 법조인 모임도 있었고요. 아무래도 성소수자의 경우 (성정체성 문제로) 회사를 계속 다니는 것, 애초에 회사에 들어가는 게 힘든 경우가 많잖아요. 그러니까 전문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사실 저도 로스쿨 졸업하면, 로펌 같은 데 들어갈 생각은 애초에 안 했고, 그냥 내 사무실 차려서 일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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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회사에서 버티는 건 정말 쉽지 않은 것 같아요. 회사 다닐 때 주말엔 트랜스젠더 커뮤니티 나가서 놀고 그랬는데, 월요일에 출근하면 ‘주말에 뭐 했냐’는 말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냥 집에 있었다 그러면 ‘왜 집에만 있냐’ 그러고, 종종 회사 동료가 같이 만나자고 초대하면 거절했는데 그럼 ‘너 왜 나 피하냐?’는 얘기를 듣게 되죠. 내가 나로 산다는 이야기를 못 하잖아요. 점점 스트레스가 쌓이더라고요. 그러니까 다른 일을 찾게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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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변호사로 일하는 건 어때요? 재미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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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치관과 일이 일치한다는 점은 정말 좋아요. 사실 일반 회사의 직장인들은 그게 잘 안 되잖아요. 보통은 자아실현은 딴 데서 하고 일은 그냥 일이다 분리하는데, 전 그게 한번에 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로스쿨 들어갈 때 막연하게 ‘그래도 내가 성소수자들을 위한 일을 조금이라도 하고 싶다’ 생각했었는데, 그 목표도 이루고 있으니까 좋죠. 물론 수입은 다른 변호사에 비해 낮을 수 있어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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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7월 4일 희망법 박한희 변호사가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김지림 변호사와 함께 대한변호사협회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동성 배우자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인정 승소’의 과정과 의미를 이야기했다.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g8OPGB3KAt4
-일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꼈던 적은 언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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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동성 배우자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인정 소송’에서 이겼던 일이죠.(참고: 혼인평등으로 가는 길, 첫 단추가 꿰어졌다 https://ildaro.com/9597) 이 건은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김재림 변호사가 메인으로 담당하고 저도 함께했는데요. 솔직히 말해서, 소를 제기할 때만 해도 ‘이기기 어려울 것 같지만 열심히 해 보자’는 생각이었어요. 1심에서 패소했지만 항소심에서 이겼을 때 너무 기뻤어요. 주변에서도 반응이 굉장히 좋았거든요. ‘한국에서도 이게 되네? 문을 두드리면 열리네?’ 이런 생각을 다른 사람들도 했다고 하더라고요. ‘하면 된다’는 걸 배운 사건이어서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많은 성소수자들에게 희망을 준 것 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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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너무 의미 있는 판결이었죠. 혹시 법조인들 사이에서 성소수자 인권과 관련하여 어떤 분위기의 변화가 좀 느껴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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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LGBTQ 법률가 대회’를 희망법이랑 공감 등이 2015년부터 진행하고 있는데요. 1박 2일 캠프인데, 작년에도 45명 정도 왔어요. 참여자도 계속 늘고 있죠. 그만큼 성소수자 법조인도 늘고 있고. 특히 젊은 층에선 ‘다른 나라에서 다 혼인평등이 되는데, 우리만 안 되는 건 좀 이상하지 않냐? 반박할 논리가 오히려 없지 않냐?’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정말 그렇잖아요. 한국만 왜 안 되는데? 했을 땐 할 말이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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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 배우자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인정 소송’도 대법원 판결까지 오래 걸렸고, 사실 판결이라는 게 언제 나올지 모르잖아요. 그 과정에서 답답함이나 스트레스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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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되겠지, 언제든 나오겠지’ 생각해요. 엄청 계획을 세우기 보다 그때 그때 맞춰서 하면 된다는 타입이어서요. ‘왜 판결이 안 나오지?’ 하면서 스트레스 받진 않아요.
그래도 일하면서 스트레스가 없진 않죠. 일단, 일이 너무 많고요(웃음) 어떤 일 하나를 진득하게 하는 건 괜찮은데, 지금 희망법 일도 하고 무지개행동 일도 하고 글도 쓰고... 여러 일들을 해야 하니까 좀 힘든 것 같아요. 역할에 맞춰서 모드를 바꿔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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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12월 10일, 세계 인권의 날을 맞이해 서울 보신각에서 열린 〈가자, 평등으로! 12.10 민중의 행진〉에서 발언 중인 박한희 변호사. ‘평등이 중심이 될 때에만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며 ‘차별금지법 제정이 민생을 살리고 사회통합을 이루는 길’이라고 말했다. (출처: 무지개행동)
-일하다가 스트레스 받으면 무엇을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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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먹어요.(웃음) 건강이 걱정되니까 운동도 하죠. 산을 좋아해서 등산도 자주 가는 편이에요. 한동안 시간이 없어서 못 갔는데 민변 산악회랑 성미산마을 산악회 소속이거든요. 한 달에 한 번은 가려고 하고 있어요. 올해 10km 여성 마라톤에 참여할 예정이라 그 준비도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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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어떤 일들을 할 계획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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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무지개행동 공동대표를 맡고 있거든요. 무지개행동 활동도 열심히 하려고 해요. 혼인평등 소송이 진행 중이고, 그와 관련된 캠페인을 진행하려 하고요.
트랜스젠더 인권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려고 해요. 무지개행동이라는 연대체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기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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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박한희의 인생 목표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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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미래를 계획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지금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10년 뒤도 예측하기 어렵잖아요? 그래서 지금 할 수 있는 하려고 해요. 그리고 지금까진 이것저것 활동도 하고 여러 곳에 관심을 두기도 했는데, 앞으로는 좀 집중을 하고 싶어요. 생각해 보면 20대를 내가 나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그 때 못했던 걸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막 했던 것 같아요. 이제 만으로 마흔 살이거든요. 나에게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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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일단 차별금지법 제정을 진짜 이뤄내고 싶고, 트랜스젠더로 살아가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고 싶어요. 중년이 되고, 장년이 되고, 노년이 되는 모습이요. 그렇게 살아가면서 계속 목소리를 내는 사람. 이런 인터뷰도 50살에 또 하면 좋겠네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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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열심히 일하실 것 같은데, 어떤 노동자로 살고 싶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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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연대하는 노동자요. 청소년 노동자, 이주 노동자, 장애인 노동자 등 정말 여러 노동자가 있잖아요. 그들과 계속 연대하고 만나는 경험을 하고 싶어요. 나의 경험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경험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는 노동자가 되고 싶습니다.